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페이로스 왕국 (문단 편집) ==== [[피로스 전쟁]] ==== [[피로스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왕국을 차마 치지 못하고 공략 방향을 고민하고 있던 기원전 280년, 타라스가 [[로마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피로스는 일전에 코르기라 섬을 공략할 때 타라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이 기회에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자신이 확보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보태기로 마음먹고, 테살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유능한 지휘관인 키네아스에게 3,000 병력을 맡겨 타라스로 보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왕과 군사 동맹을 맺고 5,000 보병과 4,000 기병, 코끼리 50마리를 지원받기로 했으며, 장남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에페이로스 통치를 맡겼다. 이후 보병 20,000명, 기병 3,000명, 궁수 2,000명, 투석병 500명, 코끼리 20마리, 수백 척의 함대를 타고 타라스로 떠났다. 이오니아 해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러운 악천후로 인해 흩어진 함대를 수습하느라 수일을 허비한 끝에, 그의 군대는 타라스에 집결했다. 그런데 타라스 시민들은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피로스는 행사, 대중목욕탕 사용 및 모든 여가 활동을 일절 금지하고 장정들을 징집해 강제 훈련시켰다. 타라스 시민들은 구원하러 왔다면서 점령군 행세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많은 이가 도시를 떠났다. 피로스는 기원전 280년 헤라클레아 전투와 기원전 279년 아스쿨룸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막심한 손실을 입었고, 타라스 등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지원도 시원치 않았다. 피로스는 이러한 현실에 회의감을 느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스쿨룸 전투 후 부하들이 승리를 축하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을 상대로 한 번 더 이런 식으로 승리하면, 우리는 완전히 패망할 것이다!" 이렇듯 [[피로스 전쟁]]에서 별 재미를 못보고 있을 때, 두 소식이 도착했다.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기원전 279년 [[켈트]]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또 하나는 카르타고군에게 포위된 시라쿠사 참주 [[티니온]]과 [[소시트라토스]]의 구원 요청이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와 시칠리아 중 어느 쪽을 택할 지 고심한 끝에, 켈트족의 침략으로 황폐화되고 있는 마케도니아보다는 부유한 시칠리아를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는 편이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타란토에 수비대를 남긴 뒤 시칠리아로 떠났다. 이에 타라스 시민들은 로마에 맞서 싸우게 하려고 고용했는데 느닷없이 시칠리아로 떠나버린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 타라스를 떠난 지 열흘 후, 그는 로크리에 도착한 뒤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그곳에 정착시켰다. 이후 현지에서 병력을 추가로 모집한 뒤 카타니아로 항해하여 병사들을 하선시킨 뒤 시라쿠사로 진격했고, 함대는 해안가에서 이들을 따라갔다. 시라쿠사를 한창 포위 공격하고 있던 카르타고군은 에페이로스군이 출현하자 즉시 퇴각했다. 이리하여 시라쿠사에 무혈 입성한 그는 도시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던 티니온과 소시트라토스를 화해시키고 티니온을 영토 방어 감독관, 소시트라토스를 용병대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 시라쿠사의 여러 도시에서 사절이 와서 그에게 귀순하며 지원을 약속하자, 그는 이들을 모두 친절하게 맞이하고 시라쿠사 전체를 장악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카르타고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헤라클레아 시를 공략했다. 뒤이어 카르타고의 영역에 속해 있던 시칠리아 서부로 진격해 여러 도시를 순식간에 확보하고 여세를 몰아 에릭스를 포위했다. 에릭스 시는 난공불락으로 명성이 자자한 도시였지만, 피로스가 보병 30,000명, 기병 2,500명, 전함 200척을 동원해 장기간 포위 공격하고 몸소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전투를 벌이는 등 용맹을 떨친 끝에 함락시켰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제물을 바치고 경기를 개최했다. 그는 시칠리아의 현지 부족으로 그리스인들을 상대로 숱한 습격과 약탈을 일삼던 마메르타이인들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역사가)|유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는 시칠리아에서의 성공 덕분에 "시칠리아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시라쿠사를 수도로 삼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시칠리아를 관리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평화 협상을 하려 했지만, 이미 시칠리아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던 그는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심지어, 그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아프리카 원정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에게 막대한 공물과 병력을 바치라고 명령헀다. 이에 시라쿠사 참주 티니온과 소시트라토스가 반발하자, 그는 티니온을 죽이고 소시트라토스를 쫓아냈다. 이에 분노한 시칠리아 도시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카르타고인과 마메르타이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카르타고 함대는 피로스군의 해상보급을 끊어버렸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했던 그는 마침 타라스가 로마의 공세로 위험에 빠졌다며 구원요청을 하자 즉시 시칠리아를 떠나 타라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가 도중에 습격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타라스에 도착한 병력은 보병 2만과 기병 3천에 불과했다. 기원전 275년, 피로스는 베네벤툼에서 로마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그는 두 집정관을 상대로 동시에 전투를 치르는 건 승산이 없다고 보고, 베네벤툼에 주둔한 마니우스 쿠리우스의 로마군을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습격대가 야간에 숲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대혼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눈치챈 로마군의 역습으로 습격대 대부분이 섬멸되고 코끼리 절반을 상실했다. 다음날, 로마군은 피로스군의 본영을 공격했다. 피로스는 이들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남은 코끼리들이 불타는 화살에 겁을 먹고 날뛰는 바람에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지 못하자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이 패배로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그는 보병 8천과 기병 500명 밖에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